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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꼭 봐야할 작품]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루브르 TMI/루브르 작품 2020. 4. 14.


야동도 없던 그 시절 유럽 남자들이 자신의 부인이 아닌 여성의 누드를 볼 수 있는 기회는 회화뿐이었다. 하지만 일반 여인의 누드를 예술이라 칭하기엔 낯부끄럽다. 때문에 그들은 여"신"의 누드를 그렸다. 주로 미의 여신 비너스를 그렸고, 미의 신이기에 가장 이상적인 비율과 피부로 그렸다. 아름다운 여체에 여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마음놓고 공적인 장소에서 탐미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뒤흔든 주제가 탄생한다. 같은 유럽인 여성의 누드화를 보는건 불경스럽지만, 우리가 점렴한 제3세계의 여인, 그것도 술탄 황제의 시중을 드는 하녀라면 죄의식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비록 피부색은 이슬람 여성이 아니라 백인일 지라도...



역사화가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던 앵그르지만 아쉽게도 후손들은 앵그르 하면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떠올린다. 관람자로 하여금 아 내가 술탄이지 참 으하하하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하는 요염한 눈빛의 여인은 오달리스크. 술탄의 시중을 드는 후궁이다. 지금의 서양 남자들이 동양 여성은 순종적일 것이라는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과거 유럽 남자들에기 술탄의 하렘은 환상 속 천국이었다. 술탄과 밤을 보내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노예들이 가득한 곳. 그 중 술탄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여인을 터키어로 오달릭(Odalik)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프랑스식으로 발음한게 오달리스크다.


이 오달리스크는 19세기 초 프랑스 회화의 주요 주제였다.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그린 후 주위에 동양의 신비한 물건들로 꾸며놓고 오달리스크란 제목을 붙이면 아 동양 여인의 누드이니 떳떳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짐짓 웃음이나오지만 그래도 애써 그 시절,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취미인 고상한 남자의 시선으로 돌아가 작품을 바라보자.



앵그르는 앞서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살펴봤던 자크루이다비드의 제자이다. 4년간 그의 제자로, 고전적인 미의 표현과 선의 활용법을 배웠다. 또한 로마상을 수상하며 정부 지원으로 로마 유학생활을 하며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을 직접 보며 그림을 배웠다. 때문에 그의 화풍은 고전적이며 그를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뽑기도 한다. 다만 그의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며 그 대표적이것이 바로 그랑 오달리스크이다.


이 작품은 1819년 프랑스 국가 그림대회인 살롱전에 출품되었는데, 너무나 긴 허리길이로 인해 혹평을 받았다. 당시 비평가들은 마치 척추가 2~3개 더 있는 것 같다는 악평을 늘어놓았다. 당시에는 앵그르에게 해부학적 지식이 부족하다며 화가의 기본 자질이 없다는 평이 돌았지만, 현대의 연구가들은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앵그르가 일부러 왜곡한 것이라 추측한다. 신고전주의는 엄격한 형식미를 중요시했던 로마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인데, 앵그르는 미가 가장 중요했던 그리스 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위해 척추 두세개쯤은 추가 할 수있는, 왼 팔보다 오른 팔이 조금 더 긴것 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오로지 아름다워 보이는것이 목표인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이다. 때문에 처음 봤을 때 허리가 긴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저 바스락 소리가 들릴 것만같은 커튼을 젖히고 솜털 하나하나가 느껴질 것 같은 풍만한 여성의 육체를 만져보고 싶을 뿐..

사물의 재질까지 표현한다는 앵그르는 여성의 피부 뿐만 아니라 반짝 반짝 빛나는 푸른색 커튼, 매트리스에 깔린 모피, 손에 든 긴 담뱃대, 황금색 요까지 실제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척추는 대중의 호감을 받기엔 너무 길었고, 앵그르는 살롱전에서 탈락하고 초상화를 그리며 삶을 연명할수밖에 없었다. 


이후 1824년 루이13세의 서약이라는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프랑스 국립 예술대학인 에꼴데보자르의 교수까지 역임한다. 그는 교수로 재임하면서 계속해서 역사화를 고집했는데, 이런 고전적인 주제는 사실주의와 아카데미즘으로 화풍이 넘아간 프랑스에서 예술을 후퇴시킨다는 오명도 받았지만 그의 표현력만큼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다. 또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위해 미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그의 오달리스크와 같은 초창기 작풍이 피카소와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후대에 루브르 박물관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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