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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꼭 봐야할 작품]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루브르 TMI/루브르 작품 2020. 4. 7.



"Quel relief, quelle vérité ! Ce n’est pas de la peinture ; on marche dans ce tableau"

"놀랍고도 진실되다! 이것은 더이상 그림이 아니오. 우리, 걸어 들어갑시다."



진짜 같지만 진실은 아닌 그림


1804년 12월 2일 노틀담 대성당, 일국 프랑스의 왕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의 군주가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 비오7세를 파리로 끌고와 황제의 대관식, 황관을 쓰는 의식을 거행한다. 그로부터 3년 뒤, 그 날의 기억이 희미해질때쯤 눈 앞에 펼쳐진 이 그림은 다시금 그 날의 행복감에 젖어들게했다. 그 날 있었던 사람들과, 있었으면 좋겠었던 사람들까지 실제 크기로 완벽하게 담겨있는 이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었을만큼 말이다.



출판물이 미디어의 전부였던 시절, 그림은 대중을 현혹하고 선동하는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루이16세의 궁정화가로, 혁명 정부의 붓으로, 나폴레옹 황제의 전속 화가로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과 충성을 이끌어내는데 타고난 천재였다. 그리고 그 능력의 최대치가 바로 황제의 대관식이다.  제목은 황제의 대관식인데 이상하게도 황관을 받는 사람은 황제가 아닌 황후다. 나폴레옹은 유럽대륙을 정복하고자 했다. 그가 떠올린 인물은 800년, 지금의 유럽땅을 제패하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으며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추앙되었던 샤를마뉴. 그와 같이 대관식을 거행함으로 온 세상에 자신의 포부를 밝히고자 했다. 본디 샤를마뉴는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았으나, 나폴레옹은 그를 거부했다. 자신은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며 로마에서 파리까지 행차한 교황을 뒤에 두고 스스로 왕관을 썼다. 


이 장면을 지켜본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이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작품 앞에 서면 왕관을 내리는 나폴레옹 머리 뒤로 희미하게 왕관을 쓰고 있는 스케치를 볼 수 있다. 다만 종교가 인정했다는, 황제가 신성시 되었다는 정통성이 필요해 교황을 불렀는데, 나폴레옹의 행위는 종교를 무시하는듯 보이기도 하다. 이에 나폴레옹이 황후 조세핀에게 왕관을 내리는 장면으로 수정되었다. 작품의 풀네임 또한 [1804년 12월 2일에 있었던 황제 나폴레옹 1세와 황후 조세핀의 대관식]으로 붙게된다. 


역사는 신기하게도 세계 곳곳에서 비슷하게 일어난다. 박정희가 물러나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듯. 왕을 몰아내고자 치열하게 싸원던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는 왕보다 더 높다는 황제였다. 국민의 열화와 같은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국민의 지지를 계속 받음과 동시에 혁명이 다시 일어나지 않겠끔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헤 자신의 장기인 전쟁을 활용했다. 이탈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고 잔뜩 고무된 그는 대관식을 연다. 그리고 그 장면을 그리도록 주문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노틀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지켜보며 스케치를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사람들이 어디에 서있는지 적었다. 이후 자신의 스튜디오에 골판지 인형을 세워두고 필요할땐 그 인물을 직접 불러 한 명 한 명 실제 크기로 그렸다. 이 작품이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150여명의 등장인물이 실제 크기로 똑같이 그려졌으며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분위기 또한 그대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작품의 배경인 노틀담성당은 말할것도 없이 똑같다. 


그러나 완벽하게 똑같이 그린것은 아니다.



남들보다 키가 작다는 것에 열등감을 느껴 이에 대한 보상심리로 타인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나폴레옹 콤플렉스라고 이름붙인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당시의 사람들도 그리고 나폴레옹 자신도 키가 작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이를 일부러 늘리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게 뻔하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 주위의 사람들을 앉히거나 멀리 떨어뜨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상 아래에 배치했다. 이에 이 작품에서 가장 크고 강력해 보이는 인물은 나폴레옹이 되었다.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으로 알려진 조세핀도 보다 젊게, 아름답게 그려졌다. 나폴레옹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로 자존심이 쎘던 조세핀이, 자신이 무릎을 꿇고 왕관을 받는 장면으로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에 분노해 따지러 왔다가 뽀얗게 그려진 얼굴에 만족해하며 돌아갔다는 설이 있을정도로 실제보다 예쁘게 그려졌다. 



실제로는 구석에서 스케치했던 자크 루이 다비드 본인도 로열석의 고관대작 사이에 그려넣었다. 나폴레옹의 엄마 마리아 레티지아 보나파르트도 실제론 참석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대관식에 형제들을 초대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현으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교황보다 높은 곳, 가장 상석에 그려졌다.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화목한 황제의 가족을 표현함과 동시에 어쩌면 가장 영화로운 순간, 엄마의 부재가 속상했던 나폴레옹의 마음을 다독인다. 마지막으로 나폴레옹 뒤 나폴레옹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인물이 있는데, 이는 카이사르라고 추측된다. 나폴레옹이 가장 존경한 로마시대 인물인데 뛰어난 능력이 있었고 본인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공화정의 벽에 막혀 끝끝내 황제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카이사르를 그려넣으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황제시여, 당신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도 당신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이름은 생소할 수 있으나 우리는 모두 그의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미술책이 아니라 사회책에서.



나폴레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을 그린 작가가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을 주제로 무려 다섯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는 국가지원으로 로마 유학을 다녀올만큼 뛰어난 수재였다. 부셰의 제자로, 프랑스풍의 작품을 그리다 5년간의 로마 유학생활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미에 심취하였고 이에 당시의 화려하고 퇴폐적이기까지한 로코코 화풍에버 벗어나 다시 "정통"예술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는 엄격한 형식미와 균형미, 입체적인 표현 등을 구현하며 신고전주의 시대를 이끌고, 도미니크 앵그르와 같은 제자를 양성했다.


루이 16세의 궁정화가였지만 그의 사형재판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혁명정부의 수장인 로베스 피에르를 위한 그림을 그렸다. 로베스 피에르의 처형 후 감옥에 갇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나폴레옹이라는 동앗줄을 잡아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나폴레옹 실각 이후 루이16세의 동생이 왕으로 등극하여 1816년 벨기에로 망명한다. 1825년 숨을 거두고 유족들은 유해를 옮기려 했지만 프랑스 왕으로부터 거부되어 결국 벨기에에 묻히게 된다. 타고난 재능으로 권력의 앞자리를 차지했지만 격동의 18세기 프랑스는 쉬이 그를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빼어난 선과 정형화된 구조를 활용하여 아름다운 작품과 함께 정치와 결탁한 예술가라는 오명 또한 남긴 자크 루이 다비드의 생애는 어쩌면 그의 뮤즈 나폴레옹의 생애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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