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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한 루브르 증개축기(루브르 박물관 역사, 루브르 왕궁 변천사, 루브르 박물관 건축의 역사)

루브르 TMI/루브르 역사 2020. 3. 19.


세계 최고의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소장 작품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800년동안 왕궁으로 사용되면서 당대 최고의 기술가들이 증축과 개축을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이 있기까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200년, 필립 오귀스트(Philippe Auguste, 존엄왕 필립, 필립2세)

앞서 소개드렸다시피 루브르 박물관의 시작은 요새였습니다.

당시 왕궁이 있었던 시떼섬을 보호하기 위해 파리 "외곽"을 성벽으로 두르고, 루브르 요새를 세웁니다.

전쟁시 도시를 보호하고, 평소에는 감옥 혹은 왕실 소장고로 활용하였습니다. 




1386년, 샤를 5세(Charles V)

아빠는 영국에 포로로 끌려가고, 시민들의 봉기로 쫓겨날뻔했던 

다사다난한 세자시절을 거친 샤를 5세는 시테섬의 왕궁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적이 센 강의 다리만 막으면 한순간에 고립 되니까요.


때문에 왕궁을 루브르 요새로 옮길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성벽은 무너뜨리고, 루브르 궁과 팽창한 파리 시를 보호할 새로운 성벽을 세웁니다.

왕궁 건물은 증축하진 않고 내부만 화려하게 바꾸고 사용합니다.




1546년, 프랑스와 1세(François I)와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y II)

샤를 7세는 영국에 대패하고 파리에서 루아르(Loire)의 쉬농소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후 프랑스 왕가는 루아르 지역에서 쭉 살아오다

1546년, 재정난으로 파리 시민의 도움이 필요했던 프랑수아 1세가 루브르 궁으로 돌아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탈리아에서 모셔올만큼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열광했던 프랑수와 1세는

음침한 요새건물을 허물고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물을 지어올릴것을 명합니다.

아쉽게도 완공되는 것은 못보고 숨을 거두었지만, 

자신이 소장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라파엘로 등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박물관의 시작을 엽니다.


이후 아들 앙리2세가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르네상스풍의 건물을 완성합니다.

지금의 슐리관에 이 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1589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édicis)

르네상스를 이룩한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 왕 앙리 2세에게 시집 온 카트린에게 

르네상스'풍'의 루브르 궁전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 앙리 2세가 자신의 이니셜과 정부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의 이니셜을 합친 문장을 

궁전 곳곳에 새겨서인지도 모릅니다. 


앙리 2세가 숨을 거두고 섭정을 위해 카트린이 파리로 돌아올 때,

루브르 궁 밖, 과거 기왓장을 굽는 공방 터에 튈르리 궁전을 건축하라 명합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만큼 아주 아름다운 궁전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610년, 앙리 4세(Henri IV)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앙리4세는 튈르리 궁전을 증축하고,

루브르 궁전과 튈르리 궁을 잇는 통로 건물을 만듭니다. 지금의 드농관이죠.

길이는 500m에 달하고, 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긴 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1715년, 루이 14세(Louis XIV)

궁전하면 빠질 수 없는 루이14세입니다.

루이14세는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와

역시나 가장 유명했던 실내 디자이너 샤를 르 브뢩(Charles Le Brun)에게 루브르 궁의 공사를 맡깁니다.

이때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화려한 전시관, 아폴론관(La Galerie d'Apollon)이 탄생합니다. 


또한 튈르리 궁을 확장,여 앙리 4세의 통로건물과 대칭으로 증축하려 합니다.

그러다 돌연 르 보, 르 브랭, 또한 정원 전문가 르 노트르에게 베르사유에 새 궁전을 지으라 명하고

완공도 되지 않은 새로운 궁으로 들어가 공사를 재촉합니다.


루브르 궁은 이후 1세기간 증개축을 멈추고, 사람들의 관심은 덜 받았지만

프랑스 아카데미로 변모하여 프랑스 과학/문화/예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는 루브르 궁을 정부 청사로 활용하였고,

왕실과 귀족의 소유물을 대중과 향유한다는 의미로

1793년 루브르 건물에 중앙 박물관(Muséum Central des Arts de la République)을 개관합니다.

대중들은 누구나 무료로 입장하여 진귀한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Napoleon I, Napoleon Bonaparte)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왕보다 더 높다는 황제를 옹립합니다. 

나폴레옹 1세는 루브르궁을 황궁으로 정하고, 루이14세가 팽개친 공사를 재개합니다.

또한 정복전쟁에서 가져온 각종 유물들로 루브르 박물관의 컬렉션은 보다 화려해집니다.

(이때의 이름은 나폴레옹 미술관)


나폴레옹 1세의 워털루 전쟁 패배 이후, 다시 왕정이 들어섭니다.

루이 18세, 샤를 10세, 다시 혁명으로 시민이 옹립한 루이 필립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튈르리 궁을 사용합니다. 

이땐 하도 시절이 하수상하여 증개축은 잠시 멈춥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며 세 번의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가 맞이한 사람은 역시나 황제였습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죠. 

1848년 나폴레옹 1세의 조카였던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파리 시 전체를 재건축합니다.

지금의 파리의 아름다운, 그리고 획일화된 석조건축물들이 그의 명령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또한 루브르 궁전의 건축도 완성하죠.

비로소 완벽한 ㅁ자 건물이 되었는데, 리슐리외관 나폴레옹 3세 아파트에 가면

그가 얼마나 화려한 궁전을 만들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지 않게끔 각종 예술/문화/스포츠 활동을 진흥시킵니다.

그 일환으로 루브르 박물관은 엄청난 컬렉션을 보유하게 됩니다. 



1871년, 파리 코뮌(Paris Commune)

나폴레옹 3세의 영화는 1870년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에서 너무나도 쉽게 포로로 잡혀가면서 끝났고,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던 파리 시민들이 시민군을 결성하며 적대국 프로이센에 저항하는 한편

꼴보기 싫은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응징으로 튈르리 궁을 불태웁니다.


흑.. 카트린 드 메디치, 앙리4세, 루이14세가 있는 힘껏 능력을 발휘해 꾸민 우리의 튈르리궁은

이렇게 역사속에서 사라집니다. 얼마나 예뻤을까....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Francois Mittérand) 대통령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은 위대한 루브르! 박물관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당시 박물관+정부청사로 이용되었던 공간을 모두 박물관으로 확장하고
지하 홀을 파내고 그 지붕으로 유리피라미드를 세웁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유명 작품들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모으면서 지금의 박물관을 완성합니다.
(사실 아직도 공사는 진행중.......)


지금까지 루브르 박물관의 증개축기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루브르 TMI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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